그는 겨울이 지나 봄이 다가오는 때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모든 겨울이란 새겨울이다. 차가운 결말도 결말이고 냉랭한 시작도 시작이니까. 그러니 코끝에 맺힌 물을 훔치며 또다시 걸을 수 밖에 없다. 두 팔로도, 온몸으로도 안 된다면 다음엔 무엇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새로운 풍선에 바람을 불어가며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첫 풍선이 터뜨린 것은 부모의 숨이었으나 그다음부터 터뜨린 모든 풍선은 나의 숨이므로. 그러므로 또다시 내리는 시간의 우박이 나의 풍선을 터뜨릴지라도, 그 모든 것이 또 한 번 잔해가 되어버릴지라도, 나는 나의 숨을 끌어안고 있다. 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여전히 그 어느 겨울에도 그 어떤 시간도 녹이지 못하더라도. 끝끝내 무엇도 녹이지 못하고 사라질지라도.
평생 이렇게 일한다고? 이 자리에서? 더 많은 것을 알지 못한 채?
이대로 계속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리고 내가 스스로를 잘 관리할 수 있다면 이렇게 책을 읽고 에세이를 쓰고 시집을 쓰고 방송을 하면서 10년 20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산다고 해도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을 테다. 하지만 평생 자의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늘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가 저기에 있었고, 들어가보지 않고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갈 수 있는 때가 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들 요량이었다.
"너는 누구니?" "세계는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나는 읽고,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생각하고 쓰고 생각하고 쓴다. 더 이상 세상을 생각하며 울지 않지만 세상의 무한함에 여전히 매료된다. 세상을 보는 안경들은 내내 흥미롭다.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땅을 더듬어가며 짐작해본다. 나의 쓰임이 이곳 언저리에 있지 않을까 어림해보며. 삶에 저울이 있다면, 저울이 있어서 불안이며 열정이며 경력 같은 것을 놓고 셈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면, 내 삶의 저울은 큰 바다를 향해 힘껏 기울었다. 아무도 쓸모를 묻지 않으나 인간이기에 포기할 수 없느 질문으로 가득 찬 바다로. 이곳에 잠겨 질식하더라도, 나보다 큰 이곳에서 나는 기꺼이 웅크린다. 몹시 행복하다.
꼭 예술로 뭔가를 얻어야 하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런 경험 하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반론은 타당하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먹고사는 이상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만 남아 있는 세계에서 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시간을 견디는 경험이란 삶의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고 의미 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해보려는 노력이며, 흘러가는 감정에 집중하고 타인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는 시도다. 그 모든 시도와 노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순에만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가볼 수 있다. 누구든지 태어나서 해볼 수 있는 경험보다 해보지 못하는 경험이 까마득하게 만힉에 우리는 함꼐 있을 때만 서로를 보완할 수있다. 그래서 함꼐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 혹은 예술만이 서로의 연장이 된다.
우리가 서로의 엽서인 만큼이나 우리는 어디에선가 좌절해야 한다. 삶은 이어지고 현실은 포장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의 산책, 혹은 여행 같은 산책, 혹은 여행이기를 바라는 산책에는 모두 잠깐의 자기중심적 환상이 있다. 물론 환상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겠냐마는. 나는 광화문의 길쭉한 건물들을 올려다보면서, 지금 저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사람들, 동물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상상력을 탓하면서, 머쓱한 마음으로 엽서의 일부가 되곤 하는 것이다.
책들 사이에서 왜 방황하는가? 왜 어떤 책을 집어 들다말고 다른 책의 유혹에 넘어가는가? 그것이 책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의 나'가 아닌 모든 것이 책에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의 삶과 다가올 세상과 모르는 감정이 책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이 될지 저런 사람이 될지 이런 세계에 방문할지 저런 삶에 틈입당해볼지를 고민하고 고민하며 하루의 1/48가량을 기꺼이 쓴다. 그중 어떤 책도 한 권으로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한 권이 다른 모든 책을 장악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기 떄문에, 그것이 책이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불완전한 상상의 파편들 중 하나를 최선을 다해 고른다.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이행해가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읽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그 연속적인 열린 과정만이 책의 경이를 담보한다. 그는 책과 책을 거치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더 넓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은 단순한 '갈아타기'가 아니라 인간의 애석한 운명을 넘어 다른 이의 몸을 입어가는 '확장하기'의 과정이다. 그리고 '확장'은 필연적으로 홀로 성공하기보다 여러 삶을 끌어안기를 요청한다.
많은 이들이 증언하듯 죽음 앞에서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지금 당장 삶이 끝나버리는 아득함이라든지, 그 허무함이라든지,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라든지, 최선을 다해 살아도 주어진 시간이 기껏해야 60년 정도라는 깨달음이라든지 하는, 오래된 교훈 같은 것들이다. 스무 살 이후의 삶은 흔한 표현을 빌려 '덤으로 주어진 삶'이다.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으므로 미래를 위해 낭비할 시간이 없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을 생각하던 10여 년의 시간을 빠져나가며 나는 다짐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껍데기에 삶을 바치지 말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여우언히 삶을 지켜낼 것.
여기서의 삶의 과정으로서의 삶, 매일의 시간, 바로 그 것이다. 어딘가 깃발을 꽂아놓고 리를 향해 달려가느라 도달하는 결과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삶은 바로 여기에 있고 그다음 몇 초간에도 있으며 바로 내일에도 있기 떄문이다. 삶은 모든 때에 있으므로 매 시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 되기를 바랐다. 나에 점점 가까워지는 삶, 내가 아닌 부분을 줄여나가고 나인 부분을 늘려가는 삶, 오래 걸리더라도 그런 삶을 살기를. 그럴 수만 있다면.
새로운 삶이란 없고 언제나 예전의 삶을 계속 이어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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