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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곡차곡 독서

[24년 01월의 독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김영민)

by stherhj 2024. 1. 27.

[프롤로그] 아침에 죽음을 생각한 이들의 연대기

살아 있지 않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한다면, 태어나기 이전도 슬퍼하거나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죽을 수조차 없다. 이미 죽어 있으므로. 살아가는 일은 죽어가는 일이므로.

삶이 곧 죽음이라면, 그리하여 이미 죽어 있다면, 여생은 그저 덤이다.

[1부] 시간의 흙탕물 속에서_일상에서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1분이 60초라는 것도, 한 시간이 60분이라는 것도,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도, 열두 달이 지나면 한 해가 저문다는 것도, 그리하여 마침내 새로운 해를 맞는다는 의식도 모두 인간이 삶을 견디기 위해 창안해낸 가상현실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주변과 자신의 비율이 변화하는 것이다.

성장은, 익숙하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작아져버린 세계를 떠나는 여행일 수밖에 없다. 익숙한 곳을 떠났기에 낯선 것들과 마주치게 되고, 그 모든 낯선 것들은 여행자에게 크고 작은 흔적 혹은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는 우리를 다시 성장하게 한다. 혹은 적어도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이 세계는 결코 전체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어떤 불가해한 흐름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일, 우리의 삶이란 불가해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위태로운 선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 이 모든 것이 성장의 일이다.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상처 입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주변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게 되는 이러한 성장 과정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확장된 시야는 삶이라는 이름의 전함을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관조 속에서 상처 입은 삶조차 비로소 심미적인 향유의 대상이 된다. 이 아름다움의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다.

그렇게 연민을 가질 떄, 사람은 비로소 상대에게 너무 심한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정체성보다는 근화오가 행위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 규정을 위협할 만한 특이한 사태가 발생하면, 새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2부] 희미한 희망 속에서_학교에서

쉬기 위해서는 일단 열심히 일해야한다. 무엇엔가 열심히 종사하지 않은 사람은, 잘 쉴 수도 없다. 열심히 종사하지 않은 사람의 휴식에는 불안의 기운이 서려 있기 마련이다. 수니다는 것이 긴장의 이완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오직 제대로 긴장해본 사람만이 진정한 이완을 누릴 수 있다. 당겨진 활시위만이 이완될 수 있다.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게 인생에 대한 스포일러라면, 진리를 결국 다 알 수 없다는 게 학문에 대한 스포일러이빈다. 요컨대, 진리를 알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 위해서 학문을 하는 셈이죠.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회사를 다니고 있는 내가 진정한 나일까? 대학원에 다니면 좀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돈을 버는 건 결국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레이디버드>, <소공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지나온 학창 생활을 평가할 것인가? 학교 졸업 후 얼마나 높은 연봉의 안정된 직장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유일한 기준은 아닙니다.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현실 사회에서 타인과 사는 일의 고통과 영광을 얼마나 잘 겪을 마음의 준비, 즉 정치적 덕성political virtue을 습득했느냐는 것입니다. 즉 얼마나 성숙한 정치 주체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졸업생들이 염두에 둘 만한 평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진행되는 동안은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죽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제가 보기에 보다 근본적인 평가 기준은, 누가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편한 직장에서 '꿀을 빨고' 있다고 해서 그 뺑소니차가 비켜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 수단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 때면, 자신을 제약하는 권위를 납득할 수 없을 때면, 다시 말해 자신이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라는 느낌이 들 때면, 누구나 그 난폭한 뻉소니차에 치일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소멸의 여부가 아니라 소멸의 방식이다. 소멸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 소멸의 방식. 어떤 소명과도 무관하게, 어떤 심미적 흔적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소멸해가는 길이 있다. 두 번째 소멸의 방식. 스스로 자신의 소명을 설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은 뒤, 그 소명을 달성함을 통해 존재 이유를 잃고, 스스로 소멸해버리는 방식이 있다.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루스트

[3부] 고독과 이웃하며_사회에서

스스로 대성당을 짓지 않으 의미가 없다. 완성된 대성당에서 편하게 자신의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차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지니고 살아야 하는 고독과 이웃하고 있으며, 각자 자신의 고독을 확립해야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나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꿈꾸었던 공동체의 몰락이 꼭 저주만은 아니었다. 젊은 날 마음속에 그린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을 서서히 잃어감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고독이 한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황야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 같다.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에 있느 나를 보는 것이 놀랍다. 왜냐하면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다른 때가 아니라 현재여야 하는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서 산다.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삶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전적으로 자유와 존엄이 박탈당한 상태에서 시작되지만, 개개인은 자기 삶의 이야기를 조율하여 존엄 어린 하나의 사태로 마무리하고자 노력한다. 비록 우리의 탄생은 유연에 의해 씨 뿌려져 태어난 존재일지언정, 우리의 죽음은 그 존재를 돌보고자 한 일생 동안의 지난한 노력이 만들어온 이야기의 결말이다. 스스로를 어찌할 도리 없는 지경에 그저 처박아버리기 위해 일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다.

복지국가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어느 절간에 가서 마음의 위로를 구하는가? 어떤 이들은 절간마저 떠나버린다.

대학이야말로, 오멜라스에서 사라진 이 비타협적인 이들을 기억하는 곳이기를 나는 바란다. <자기의 이유로 살아라>

시시포스의 형벌을 이루는 3요소인 노고, 덧없음, 끝없음 중 하나만이라도 제거할 수 있으면 그 인생은 더 이상 시시포스의 고된 삶이 아닐 것이다.

[4부] 이 세상 것이면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하여_영화에서

<안토니아스 라인>

[5부] 맛없는 디저트를 먹기에 인생이 너무 짧잖아요_대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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